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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소에 두고 온 시

박호성, 『공동체론-화홰와 통합의 사회․정치적 기초』, 효형출판, 2009



 한 사람만이 '역설'에 대해 꿈꾸면 이는 꿈일 뿐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역설'을 함께 꿈꾼다면 그것은 현실이 되지 않겠는가. 바람의 방향은 바꿀 수 없어도, 배의 방향은 조정할 수 있지 않는가. 낙관론자는 꿈이 이루어지리라 믿고, 비관론자는 악몽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고 하지 않던가……
 불현듯 키르케고르까지 나타난다. 그는 "역설은 사고의 열정"이라 부추긴다. 오직 위대한 영혼만이 정열에 자기를 내맡기듯이, 오직 위대한 사상가만이 역설 앞에 자기를 내놓는 것이요, 역설 없는 사상가란 마치 정열 없는 애인과 다를 바 없다고 다그친다. 나아가 키르케고르는 "모든 정열의 극치는 항상 자기 자신의 파멸을 의욕하는 데 있다"고 역설한다. 그리하여 오성의 최고 열정 역시 충돌하면 결국은 자기 파멸로 끝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충돌을 욕구하는 것이라 강조한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고의 최고의 역설은, 자기가 스스로 사고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이라는 외침으로 끝맺는다. 키르케고르는 도전에 한계를 두지 말고, 오히려 한계에 도전할 것을 권유하지는 않았을까. p626

 자연이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썩은 풀숲에서 여름밤을 밝히는 반딧불이가 나오고, 더러운 흙 속에 살던 굼벵이가 자라 가을바람에 이슬 마시는 매미가 되는 것처럼, 그리고 진흙탕 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처럼, 진실로 깨끗한 것은 언제나 더러운 것으로부터 나오고, 밝음 또한 언제나 어둠에서 비롯하지 않는가. 방향석 식물은 성장하는 동안에는 향기를 내뿜지 않는다. 하지만 이윽고 땅 위에 떨어져 짓밟히고 으깨어지면 달콤한 향기를 사방에 흩날린다. 이러하니 어둡고 더러운 비리와 부조리를 잘 퇴치함으로써 더욱더 밝고 깨끗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것, 이 역시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일이기도 하지 않겠는가.
 이처럼 우리의 앞에는 걸림돌을 디딤돌ㄹ로 만들어나가야 하는 역사적 과업이 놓여 있다. 하지만 낚시줄을 물에 드리우지 않고 어찌 고기를 잡을 수 있겠는가. 시도했다가 실패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유일한 죄는 다만 시도하지 않는 것, 그러니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두려움뿐이리라.

그런데 이러한 나의 꿈은 이상인가, 환상인가.

 다만 드넓은 광야에서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려 다니는 모래알만한 불씨라도 되어준다면 하는 소박한 꿈일 따름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한 여정이 플라톤과 토머스 모어, 로버트 오웬을 거쳐 한국의 공동체까지 지난한 여정을 끝마쳤다. 함께 읽고 있는 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과 많은 부분 겹친다. 우연인지 아니면 과학적 사고의 결과인지 좀 더 두고볼 문제이지만. 이 책을 통해 로버트 오웬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시민사회운동의 역할에 대해서 다시 고민하게 만드는 여지를 남겨두었다. '거리 좁히기'란 단어 속에서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얼마나 좁힐것이냐에 대해서는 이미 대학시절부터 나를 괴롭히던 화두였던것이다. 그런 면에서 난 이상주의자도 아니었고 현실주의자도 아니었다. 현실속에서 이상을 때론 이상속에서 현실을 꿈꾸는 소아적 발상이 내 혈관속에 여전히 유효하다고 느낀다면 지나친 자기 합리화일까. 간혹은 이상적인 발언들이 조금은 거슬리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스펙트럼 역시 예사롭지 않다.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지만 결국 이것 또한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공동체 또는 평등 연대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가볍지만 의미있게 읽혀질 책이다. 아마 조만간 다시 정리하며 읽어보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