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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소에 두고 온 시

김선우,『김선우의 사물들』,눌와

『김선우의 사물들』,김선우, 눌와

김선우의 사물들에 대한 간단한 소개

이 책은 원래 한 기업의 사외보에 <생활속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시힘’의 동인인 시인 김선우가 쓴 글을 묶어 놓은 것입니다.  격월간지에 실린 글이기 때문인지 사물들에 말걸기라는 일관된 주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각 편마다의 느낌은 전혀 다르며, 길지 않은 내용임에도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기가 아까울 정도의 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숟가락, 의자, 못, 부채등 20개의 사물 하나나는 사물 본연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시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물건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물의 본질을 그대로 담아내면서도 새로운 것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주변의 생명까지 아울러 새로운 사물이 되는 것, 이 책의 사물들은 시인의 손길로 단지 사물이 아닌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 숨쉬게 됩니다.


주변의 사물들이 살아 숨쉰다. 독특한 느낌이 있겠는데요.

앞에서 풍경 이야기와 비슷한 점이 있을 것 같네요. 풍경이든 사물이든 이미 거기에 있거든요. 그것에 조용히 말을 걸고 속삭이는 거죠. 그러면서 사물의 이미지에다 자신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투영하는 거죠.

작가 스스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건넬 말을 기꺼이 받아줄 만한 사물과 만나야 한다. 내가 말을 걸어도 그가 자기 속내를 보여줄 의사가 전혀 없다면 곤란해진다. 사물의 속내란 그것에 말 거는 내 무의식의 속내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책은 김선우씨가 사물을 매개 삼아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을 펼쳐 보인 산문이기도 하고 시이기도 하고 소설이기도 합니다. 들어보시면 마음속으로 그려보시면 될거에요


사람이 살던 집에는 예외 없이 못이 박혀 있다. 못이 많은 집도 있고 못을 아낀 집도 있지만 사람이 사는 집은 거의 언제나 못과 함께 꽃 피면서 늙어간다. 한 번도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없는 새집에서 나는 종종 허둥거린다. 여러 번 집을 옮기며 살았지만 여전히 나는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많은 집들이 좋다. 누군가 박아놓은 못을 들여다보고 상상하면서 못 하나가 매달고 있던 삶의 흔적을 쓰다듬어가다 보면 어느 결엔가 못에 찔려 피가 나기도 한다. 피 흐르는 못 자국을 또 가만 들여다보면 그 못이 오랫동안 내 속에 뿌리내리고 있었던 것임을 문득 알게 되기도 한다. 어쩌겠는가. 못이 없는 집이란 없는 것이다. 수직의 벽을 대지 삼아 뿌리를 내리며 자라고 있는 못들 앞에서 나는 종종 즐겁게 벽이 되기도 한다. 그러면 가끔 알게 될 때가 있다. 상처가 오롯이 상처로 깊어지면 상처에서 꽃이 피기도 한다는 것을. 못의 뿌리가 닿는 자리들이 간질거리며 무엇인가 자꾸 피워내고 있다는 것을. 상처 난 살갗에 새살이 돋을 때처럼. 새순이 돋아나기 시작한 겨울나무 가지 끝처럼. 못 견디게 간질거리는 어떤 그리운 느낌이 못의 뿌리로부터 대지로 번져나가는 것을. 그 황홀한 통증의 뿌리들은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자기 무게의 수십 배가 넘는 사물들은 지탱한다. 못들은 힘이 세다.      65p ~ 66p


못에 다양한 느낌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사물에 대한 생각들은 그것이 버려질때가 아닐까 싶어요. 이걸 버릴까 말까에 대한 생각과 고민을 통해 사물의 생명들이 대부분 결정되죠. 요즈음에는 예전에 비해 많은 물건들이 그들의 생명이 다하기 전에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경우들이 비일비재하죠. 저같은 경우에 헌책방의 느낌이 그렇습니다. 헌책을 사면 전 주인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거든요. 줄을 쳐놓은 부분 혹은 간단한 메모와 낙서들. 그 흔적들을 보며 이 사람은 이렇게 책을 읽었구나 하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가끔 헌책방에 들리는데 헌 책의 묘미는 싸다는 것 외에도 나와 같은 책을 읽은 그 누군가를 많나는 느낌이죠. 예전에는 도서실에서 책을 빌리며 뒤에 회원번호와 이름을 적어놓았거든요. 그 때에도 같은 책을 읽은 다른 사람의 흔적을 조금씩 보게 되죠.


아까 김선우의 의식을 드러낸다고 했는데 어떤 식으로 사물을 통해 자신의 의식을 드러내나요.

제 또래의 사람들이라면 꿈꾸던 빨간색 상표의 날렵함이 느껴지는 운동화가 있거든요. 그건 아마 하나의 소망이었을 겁니다. 이 책에서 사물들에 대한 소소한 시인의 감정이 느껴집니다. 이를테면 새 옷을 입기 위해 일부러 넘어져 바지를 찢던 기억. 이건 저도 경험이 있습니다. 또 닳을 대로 닳은 러닝셔츠로 만든 걸레에 대한 창피함. 생계를 책임지면서 처음으로 가져본 한 칸짜리 옥탑방, 중학교 시절 미래의 내 남자를 보기 위해 장독대 위에서 입에 칼을 물고 거울을 보던 소녀. 이렇게 사물들에는 우리의 추억이 조금씩은 담겨져 있습니다. 그 조그마한 추억들을 작가는 아주 잘 끄집어냅니다. 가을입니다. 낙엽이 떨어지는 이 쓸쓸함 속에서 주변에 있는 아주 작은 것에 한번 눈길을 주며 추억을 이끌어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음지에 놓인 사물들이 있다. 쉽게 발화되지 않는. 명명하기 꺼려지는 사물들의 세계가 존재한다. 우리의 필요에 의해 존재하게 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의 가치를 은연중에 폄하하게 되는 사물들 앞에서 우리가 지닌 허위의식은 난간에 선다. 걸레라는 사물을 왠지 피해가고 싶어 한, 동류가 되어서는 안되는 무언가 더럽고 쇠락한 범주로 규정하고 있던 내 고정관념이 얼마나 위선적인 것인지 돌연 깨닫는다. 걸레는 양지를 품은 음지의 사물이다. 걸레는 정결함을 품은 더러움의 형식으로 존재한다. 걸레의 존재방식은 생의 한가운데처럼 복합적이다.

걸레는 축축하다. 그것은 흔히 유쾌하지 않은 후각과 축축하게 젖어 있는 촉각과 어딘가의 구석에 쑤셔 박히듯 숨겨진 시각의, 헝클어지고 복합적인 공감각으로 존재한다. 시각과 청각 혹은 시각과 촉각 등 두 개 이상의 감각작용을 촉발하는 사물들은 흔하지만 후각까지를 자기 존재의 숙명으로 받아들인 사물은 흔하지 않다. 후각은 생의 생의 비밀, 낮은 지대의 뒷골목에 가장 핍진하게 밀접해 있는 감각이며 가장 능동적으로 어딘가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감각이다. 걸레는 하나의 사물이 지닐 수 있는 가장 복합적인 감각을 지닌 채 어디엔가 방치된다. p120 ~ p121


걸레가 지니고 있는 복합적인 감각이라 참 독특한 표현인듯 싶네요

시인만이 가지고 있는 통찰력인듯 싶습니다. 자유로운 상상력과 도발적인 표현으로 시를 써온 시인답게 걸레라는 아주 하찮은 물건조차 그녀에게는 아주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가게 만듭니다. 걸레의 마지막에 이런 말을 그녀는 합니다. 퀴퀴하면서도 어딘지 흙냄새를 닮아 있는, 걸레 냄새는 시들어가는 것과 피는 것의 순환을 담지한 냄새다. 그래서 걸레는 저물고 뜨는 것들의 경계에서 지상의 얼룩을 지우고 나는 걸레가 지나간 자리가 꽃 피는 것을 엎드려 오래 바라본다. 이 글을 읽고 집에서 한참동안 걸레를 쳐다보기도 하고, 냄새도 맡아보면서 걸레를 노려보았습니다. 아마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아주 이상한 행동이었겠지만요.


김선우의 사물들을 보면서 주변을 한 번 주의깊게 둘러봐야 겠네요

네 글의 첫머리에 보면 이 책을 읽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 놓은 것이 있네요. 순서는 잊고 마음에 드는 제목부터 건반을 튕기듯 읽어주면 좋을 듯 싶다고요. 너무 빠르지 않게. 가능하다면 하루에 하나의 사물씩만. 그리고 책을 읽는 순간 당신이 보고 있는 사물의 말을 오직 당신 식으로 들으면서.

눈앞에 핸드폰이 있다면 그 핸드폰을 조심스럽게 불러내보세요. 그리고 조용히 대화를 나누어 보세요. 눈앞에 놓인 핸드폰이라는 사물에게 또는 주변에 있는 사물들에게 이야기하며 비오는 오늘을 이 책과 함께 보내는 것도 좋은 하루 보내기가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