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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소에 두고 온 시

고종석,『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문학과 지성사


인간의 언어는 대단히 정교하고 섬세하다. 물론 시인은 때로 자기 마음의 미세한 결에 꼭 맞는 표현을 모국어에서 찾지 못해 절망하고, 과학자는 정서의 찌꺼기와 중의성으로 오염된 자연언어가 마땅치 않아 자주 수학언어에 기댄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와 비슷한 구실을 하는 다른 동물들의 커뮤니케이션 수단과 비교해서는 물론이고, 수화나 공공표지판을 비롯한 인간의 비-언어 커뮤니케이션 수단들과 비교해도, 자연언어의 정교함과 섬세함은 탁월하다. 특히 오랜 세월의 문학사를 통해 수많은 작가들이 갈고 닦은 자연언어들의 경우라면 더 그렇다,

 인간은 언어를 만들어냈지만, 일단 만들어진 언어는 인간을 만든다. 우선 개념의 차원에서, 세계는 연속적이지만, 그것을 묘사하는 언어는 비연속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계를 이리저리 절단해 그 조각들을 하나의 어휘소(나 형태소)에 대응시킨다. 세계를 절단하는 방식은 다분히 우연적이지만, 절단된 세계의 조각들과 특정 어휘소들의 대응이 한 언어체계 속에서 약속으로 확립되면, 세계의 그 절단 방식은 그 언어 사용자들에게 자명하게 느껴진다.

(........) 문자의 발명은 분명히 인류의 지식 축적방식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그 덕분에 인류의 집단적 기억의 용량은 무한대로 늘어났다. 그러나, 애달파라, 바로 그 집단적 기억의 폭증은 개인적 기억의 왜소화를 가져왔다. 기억의 전승을 문자가 떠맡게 되자마자, 인간은 자기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이야기를 굳이 머리 속에 담아둘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인쇄술의 보급은 이야기꾼과 음유시인들을 퇴출시켰다.

(『출판저널』 99/07/05)


외로움

 쓸쓸한 느낌. 고독한 느낌.

 외가 들어간 말들은 대체로 외롭다. 그 외는 홀로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외톨이가 그렇고, 외바퀴가 그렇고, 외나무다리가 그렇고, 외짝 신발이 그렇고, 외손뼉이 그렇고, 외아들이 그렇고, 외딴방 ․ 외딴길 ․ 외딴집이 그렇고, 외기러기가 그렇다. 사랑은 외로움을 치료하는 행위이지만, 자주, 더 큰 외로움을 낳는다.


사랑

 여자가 남자에게, 또는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한국인들에겐 아직도 너무 버거운 의식이다. 유럽인들이라면 두 단어나 세 단어로 표현해야 할 그 사랑의 고백을 한국인이라면 주어와 목적어를 생략하고 그저 사랑해, 라고 한미디 하면 되지만, 그 한마디는 유럽어의 백 마디보다도 입 밖에 내기가 더 힘들다. 마음속에 갈무리돼 있들 대는 그리도 순결하고 심지어 숭고한 느낌을 주는 그 사랑이라는 한국어는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뱀처럼 징그러운 그 무엇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꼭 사랑을 고백하고는 싶은데 사랑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내거나 종이 위에 쓸 용기가 없는 젊은이들은, 그 감정을 자기들이 알고 있는 외국어로-대개 유럽어가 되겠지만-표현하기도 한다. 대체로 외국어에는, 모국어가 주는 만큼의 구체성 ․ 육체성 ․ 직접성이 없으므로. 그것은 느끼는 언어가 아니라 이해하는 언어이므로. 자기가 내뱉거나 휘갈긴 말에 대한 자신의 관련성이 엷어지는 듯한 느낌을 주는, 그러니까 자기 발언에 대한 책임을 덜어주는 듯한 느낌을 주는, 그러니까 자기 발언에 대한 책임을 덜어주는 듯한 느낌을 주는 언어이므로. (중략) 때로 사랑의 고백은 난 네 거야라는 굴종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첫사랑이라는 말은 사랑이라는 말보다는 덜 낡았다. 그 말은 아직도 나들 들뜨게 한다. 첫정이나 첫눈이나 첫서리나 첫겨울이나 첫얼음이나 첫닭이나 첫무내다 첫새벽이라는 말이 그렇듯. 처음이란 늘상 좋은 것이다.

 풋사랑이라는 말도 나를 들뜨게 한다. 풋나물이나 풋나무나 풋사과나 풋잠이나 풋술이나 풋담배나 풋가지나 풋감이나 풋게나 풋곡식이나 풋밤이나 풋배 같은 말이 그렇듯. 풋풋한 것은 늘상 좋은 것이다. 풋내기의 풋솜씨까지도. 내게는 풋볼이란 외래어까지도 풋풋하게 느껴진다.

 짝사랑은 제 짝을 찾지 못한 사랑이다. 그것은 짝짝이의 사랑이다. 짝눈과 짝귀와 짝버선과 짝신이 그렇듯. 그러나 그것은 대체로 참사랑이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내리사랑이 그렇듯. 아니나다를까, 그 내리사랑은 대체로 짝사랑이기도 하다. 내리사랑은 있어또 치사랑은 없다는 속담은 사랑의 편도를 가리킨다. 치사랑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흔치도 않을 것이다.


눈맞추다

 남녀 사이에 서로 사랑하는 눈치를 보이는 것을 눈맞춘다고 한다. 사랑은 눈에서 시작된다. 눈맞춤은 모든 사랑의 整地 작업이다. 눈맞춤이 있은 뒤에야 입맞춤이 있을 수 있다. 눈이 맞은 뒤에야 배도 맞는다. 눈은 입술보다 더 빨리, 더 많이 , 더 정확히 말한다. 눈은 귀보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정확히 듣는다. 눈은 리얼리스트다. 눈은 그리움의 통로다. 눈에 어리다, 눈에 선하다 같은 말은 그리움이 있는 사람에게 소용되는 표현이다. 눈맞추다나 눈맞다만이 아니라 눈가다, 눈독들다, 눈독들이다, 눈주다, 눈웃음치다 같은 동사들은 사랑에 눈뜬 사람에게 소용되는 동사다.


설레다

 바람이 들다 : 군태가 치료되기 시작하다.

 설렌다는 것은 누군가가 당신 마음속의, 그러므로 당신 몸 속의, 사랑의 버튼을 눌렀다는 뜻이다. 당신이 접속됐다는 뜻이다. 누군가가 당신의 혈관에 媚藥을 주사했다는 뜻이다.



 

 봄바람은 사람을 바람나게 한다. 봄바람에 얼굴을 내 맡기면 솜털을 간질이는 듯 얼굴에 느겨지는 감촉이 봄이 온 것을 느끼게 한다. 겨울바람의 차가움속에서 움트는 새싹처럼 봄은 어느새 알게 모르게 우리곁에 와 있다. 봄이면 사람의 마음이 설레인다. 이 설레임은 억누를 길도 없고 억누를 이유도 없다. 사람도 이 자연속의 봄을 느끼며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봄이 어느덧 우리의 얼굴을 스치우고 있다. 항상 봄이 오지만 그 봄속에서 우리는 항상 새로움을 느끼고 있다. 새해의 시작은 1월이지만 계절의 시작은 봄이기에, 그 봄속에서 우리는 1년을 새롭게 다시 시작한다.


항상 봄이 다가오고 꽃이 피어나고 생명이 천천히 기지개를 펴는 것처럼 내 마음속에서 항상 진한 울림을 주는 책이 있다. 아주 오래전에 읽었지만 그 울림이 주는 기분은 항상 봄처럼 새롭다. 누군가 나와 생각이 통하는 사람에게 조용히 건네주는 책. 많은 사람들이 읽기보다는 마음이 통하는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싶은 책이다.


누군가가 이 책을 읽었다면 아니 이 책속에서 나와 비슷한 울림을 경험한 사이라면 그와는 오랜 시간 이야기 하지 않아도 말이 통할 것 같다. 마치 오랜 동면을 지나고 해토무렵에 조금씩 올라오는 해토무렵의 새싹을 바라보고 웃음짓는 것처럼


내가 좋아하는 작가

 내가 처음으로 고종석을 만난 게 바로 이 책이다.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이 책 이전에 『기자들』이란 소설을 쓴 적이 있고, 이 작품의 작가가 한겨레 신문의 기자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우연히 서점에서 발견하게 된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이 96년의 봄이었나 보다. 책을 읽고 난후 오랜 시간 떨림이 있었고 그 떨림은 10년이란 세월이 무색하게 지금도 강한 여운을 남겨준다. 어쩌면 이 책 때문에 고종석이라는 사람에 대한 부러움(좋아하는 작가중의 한사람)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이후 그는 많지는 않지만 몇권의 책들을 펴 냈고 지금도 내방 서가에 한 자리를 차지하며 나에게 조용히 손짓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때때로 고종석의 글에선 답답함도 배어나온다. 뚜렷이 하고자 하는 주장의 강약이 드러나지 않고 꼬집어 얘기하기 보다는 주변부로 휘 감아 돌다가 맺어 버리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종석이 자신의 논리에 헛점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자신의 글 곳곳에 치밀한 논리 장치들을 매설해 놓으며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러한 완벽주의는 글에 숨소리 들어갈 여지조차도 남기지 않아 더러 거북함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티끌 하나 없는 완벽한 예술품을 만날 때 우리가 느끼는 불편함과 비슷한. 그러나 고종석의 글에 흠잡을 데가 없다는 점은 단점이라기 보다는 장점으로 평가되어져야 한다.

 언론인으로서의 역할로 해 내고 있는 주장이 실린 사회비평문 들도 뛰어나지만, 고종석이 특히 심혈을 기울이는 언어에 천착한 글들도 매우 뛰어나다. 특히 모국어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그의 애정은 한글 순수주의자들의 그것과는 다른 색깔을 띄지만, 또한 매우 강렬해서 그의 한국어에 대한 글들을 읽노라면 가히 한국어에 대한 편집증이라 느껴질 정도다. 그의 한국어 사랑은 이 언어를 어떤 틀이나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게 풀어주는 데에 맹점이 있다. 흔히 한글 순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한국어 사랑처럼 언어를 순결한 것으로 속박하고 얽메어 두려 하지 말고 외래어와 불순하게 섞이어 자유롭게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 한국어의 생명력을 키우는 길이라는 것이 고종석의 견해이다.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은 봄을 알리는 시작처럼 우리말에 대한 개인의 작은 고백이다. 그 고백이라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개인적이지만 결코 사적인 기록물이 아니기에 더욱 공감을 얻는지도 모른다. 사랑의 말들에 대한 섬세하고 다양한 울림을 통해 고종석의 우리말에 대한 애정을 읽을 수 있었고 그 애정에 전염되어 가고 있다. 마치 봄향기가 우리를 설레이게 하듯 고종석의 이 책은 나를 설레이게 만든 책이었다.


 고종석의 언어에 대한 생각


 존재는 의식을 구속하고 언어는 의식을 반영한다. 그러니까 존재는 의식을 매개로 언어를 구속한다. 그러나 모든 구속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상호구속이다. 존재가 언어를 구속하는 것만큼은 아닐지라도, 언어도 존재를 구속한다. 줄 사이의 관계는 일종의 되먹임(feedback)관계다. 존재는 언어를 구속하고, 언어는 다시 존재를 구속한다. 말을 바꾸면, 사회 구조는 언어에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언어는 사회 구조에서 자신의 메아리를 듣는다. 요컨대 언어와 사회는 영향을 주고 받는다.

작가는 한국사회가 자연 언어 가운데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복잡하고 엄격하고 정교한 경어체계를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이 경어체계가 예절이라는 말로 이 사회를 유지시키는 버팀목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지나치면 사회를 옭아매 생기를 빼앗는 오랏줄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작가는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을 통해 이 지점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극히 개인적인 울림들을 단어를 통해 풀어내면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구속에서 벗어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잡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썼다고 하지만 그 잡음은 고종석을 잡고 있는 사회적 올가미가 아니었을까! 언어가 존재를 구속한다면 그 존재를 해방시키는 방법은 언어를 해방시킨다고 하면 지나친 억설일까

어쨌든 작가는 자유롭게 말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말한다

“ 몸을 버리다, 몸을 더럽히다, 몸을 바치다, 몸을 빼앗기다, 몸을 팔다 같은 표현에서 그 몸은 신체, 육체라는 뜻과 情操라는 뜻을 함께 지니고 있다. 나는 이런 표현들의 봉건성에 구역질이 난다”

 

 우리말에 대한 개인의 고백


 이 책은 이사한 뒤로 잡음과 소음 때문에 잠이 형편없이 부족한 상태가 계속되자 미움과 신경질로 가득찬 몸에 대한 위기감을 느겼고, 그 위기감을 증화시키기 위해 사랑에 대한 생각을 하게되었다고 한다. 그 배경과는 달리 이 책에 나온 우리말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그의 이력처럼 많은 인연의 고리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자는 스스로 문헌학자도 언어학자고 민속학자도 사회학자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 책은 그저 사랑의 말들에 관한 몽상의 기록이라고 말한다. 이 몽상을 통해서 제도로서의 사랑에서도 해방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는 75개의 단어를 가지고 사랑에 관한 말을 하고 있다. 그 말은 몽상이면서 그의 삶을 현현하는 소소한 기록들이다. 사랑에 대한 느낌과 함께 이 사람은 이러한 삶을 살았고 살아가고 있구나를 엿보게 한다. 그가 가진 단어들의 느낌들을 통해 그와 함께 대화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개인적인 몽상이라고 하지만 그 몽상속에서 나는 옛 기억을 떠올린다. 고종석과는 같은 느낌은 물론 아니다. 사랑의 말들에 대한 고종석의 몽상과 나의 몽상이 합쳐져 봄의 향기처럼 달콤하게 속삭인다.


 말에 대한 개인의 깊이와 울림이 이렇게 강한지 이 책을 보고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우리의 기억 속에 아련하게 남아있는 빛 바랜 사진의 추억을 하나씩 들추어 보듯, 사랑의 말들을 통해 우리는 지나간 옛 연인을 만나고 있는지도


그리움


그립다의 어원은 동사 그리다이다. 그리는 마음이 간절한 상태가 그립다이다. 이 동사 그리다는, 그리워하다와 비슷하게, 어떤 대상을 간절히 보고 싶어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동사 그리다에서 형용사 그립다가 나왔고, 형용사 그립다에서 다시 동사 그리워하다가 나왔다.  그리다에서 그립다를 거쳐 그리워하다에 이르는 과정은 어떤 대상을 보고 싶아하는 마음이, 말하자면 결핍감이 - 보고 싶어하는 마음은 일종의 결핍감이므로, 바로 옆에 있는 대상을, 그러니까 지금 볼 수 있는 대상을 보고 싶어하지는 않으므로- 외적표현의 상태에서 새김(

또는 삭임)의 상태로 침잠했다가 그것이 넘쳐흘러 다시 외적 표현의 상태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돌아간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지양된다고 말하는 것이 사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리다-그립다-그리워하다의 전개 과정은 그러니까. 굳이 말하자면, 변증법적이다. 그것은 결핍감의 변증법이다.

그립다라는 형용사가 긴장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 동사이 그리워하다라는 동사들로 장엄하게 전화된다. 그 팽팽함과 퉁겨나감은 가히 양질 전화라 할 만하다 (기쁘다/기뻐하다, 슬프다/슬퍼하다, 아쉽다/아쉬워하다, 아프다/아파하다, 즐겁다/즐거워하다, 고깝다/고까워하다)


하나의 단어의 변화단계를 이만큼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학교에서 문법을 설명하다 보면, 마치 하나의 수학공식처럼 언어를 상자안에 가두어 버린다. 통통거리는 움직임이 있는 언어를 상자안에 가두어 놓고 이리저리 재단하고 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박물관에 박제된것이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입말로서 이리저리 움직여다녀야 하는데 고종석의 단어에 대한 풀이는 생명력이 넘쳐 흐른다. 단어 하나에 이렇게 많은 의미를 두고, 그 의미속에서 굳어져버린 화석이 되어버리기보다는 몸 밖으로 흘러나와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 장엄학과 팽팽함을 견디나 못해 변해버리는 언어들이란 표현 이게 바로 고종석의 글의 참된 멋이 아닐까!!



몇가지 말들


 그립다 : 그립다는 그리다의 내적 침잠이다. 그리고 그리워하다의 고치이다. 그리움은 결핍으로서의 사랑이다. 신경숙의 서늘한 고백에서 “그리움과 친해지다보니 이제 그리움이 사랑 같다. 사랑이 와서, 우리들 삶 속으로 사랑이 와서, 그리움이 되었다.

그리워하며 산다는 것은 삶의 또 다른 가치이다. 누군가에게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는 것도 그리워 한다는 것도. 문득 머릿속에 떠 오른 사람 힘이 들때 눈부시게 푸른 하늘 쳐다보면 생각나는 그 사람 그립다.


: 몸이 있는 탓에 이렇게 너와 떨어져 있어야 하지만, 몸이 없다면 어떻게 너를 만져볼 수라도 있을까?


속삭임 : 낮음 목소리로 가만가만 정답게 하는 말. 사랑의 말은 대체로 속삭임이다.


속닥이다, 수군거리다 와는 다르게 속삭임이라는 단어는 크게 이야기하면 안 될것 같은 느낌을 준다. 수업중 학생들이 떠드는 속닥임이 아니라, 조용히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싶다. 그 속삭임은 들을 수 없지만 내 마음을 들뜨게 한다. 무슨 내용이었을까 당신도 몸을 앞으로 내밀어 귀 기울여 보아라...


 껴안다 : 두 팔로 끼어서 안는다는 뜻이다. 그저 안는다라고 하거나 보듬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동사 안다나 보듬다는 덩치가 큰 쪽을 주어로 삼고 덩치가 작은 쪽을 목적어로 삼는다. 껴안다에는 그런 제약이 없다. 말하자면 껴안다는 안다나 보듬다보다 더 민주주의적인 동사다.


사랑이란 말이 넘쳐나고 너무 흔하게 쓰이고 있지만 과연 우리는 제대로 사랑하고 있는지. 사랑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맺음이다. 그 관계맺음에서 우리는 자신만을 생각하고 있는건 아닌지 내가 아닌 누군가를 생각하고 배려하고 그리는 것이 사랑이라면 이제 우리 상대방을 가슴을 한번 꼭 껴안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