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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ism

지배와 그 양식들 memo4

한밤중에 홀로 정원에서 바람을 쐬고 있는 어떤 자를 가정해보자. 그를 몰래 바라다 보는 것은 어떤 느낌을 가져다 줄까? 적어도 그때 만큼은 그 사람의 내면이 나의 내면에 와닿지 않을까? 홀로 바람을 쐬고 있는 자의 모습은 차라리 홀로 바람을 쐬고 있는 '내면'의 모습으로, 바람 앞에 자신을 노출시킨 '내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홀로'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은, 오직 '홀로'일 때에만 그 바람이 말 건네고 있는 내면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그가 누군가와 같이 있다면 일상의 대화 속에서 그의 내면은 자취를 감춰버릴 것이다.

그러한 사람에 대해 느끼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의 원천은, 어떤 정의할 수없는 친밀감의 원천은 무엇일까? 그 사람이 우리에게 보내오는 '신호'는 하나의 내면의 신호이다. 우리는 라이히가 말한 '성격갑옷'이 아닌, 융이 말한, 마스크라는 의미에서의 '페르조나(persona)'가 아닌, '내면'을 만날 때 소통에의 욕망을 느낀다. 우리의 내면성은 타자의 내면에 마주칠 때 언제나 스스로를 열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일까? 물론 우리의 내면성이 경직되어 있을 때, 판단을 이미 내리고 있을 때 타자의 내면은 다시 튕겨져나갈 것이지만 말이다.

 

가에탕 피콩의 <프루스트 읽기>에서 다음과 같은 대목을 읽을 수 있다. "아버지가 부르자, 그는 나무가지에서 내려오고 그 와중에 생트-엘렌의 회상록을 떨어뜨린다." 이 장면이 우리들 앞에서 벌어졌다고 가정해보자. 우리의 시선은 그가 떨어뜨린 책이 어떤 책인지 알고 싶어 책의 표지 위로 향할 것이다. 나무 위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자신에게 소중한 무엇을 은밀히 읽는다는 느낌을 전해준다. 그는 나무 위에서 자신의 내면의 시간을 가졌던 것이고 그가 나무 위에서 읽던 책은 그의 내면을 은밀히 두드리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 책의 표지 위로 시선을 옮기는 것은 그의 내면을 탐색하기 위한 것이다. 그 책의 표제에서 내가 '공명'하는 바가 있다면, 나는 내 마음 속에서 그에게 무척 가깝게 다가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내면이 나의 내면과 교감할 수 있다는 믿음과 함께, 영혼의 동향인으로서 말이다.

 

<되찾은 시간>의 첫머리에서 마르셀은 저녁시간에 질베르뜨와 함께 꽁브레의 오솔길을 산책한다. 우리도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때 누군가와 같이 숲 사이를 산책한다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을 같이 걸으면서 그 느낌을, 숲의 향기를, 자연의 냄새를 같이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내면성들이 같은 느낌에 대해 열려, 같은 느낌을 받아들여, 같은 내면성이 된다. 이는 착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같이 열리는 내면성들, 같은 느낌을 받아들이는 내면성들은 서로간의 친밀함으로 연결된다. 물론 나와 타자가 세상사의 들끓음으로부터 벗어나서, 자기주장으로부터 벗어나서, 한 발작 물러난 자의 편안함으로 느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하겠지만 말이다.

 

누군가를 물끄러미 들여다 보게 될 때가 있다. 그처럼 응시한다는 것은 때에 따라서는 그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 보겠다는 것, 또는 '그사람의 존재 자체'를 보겠다는 것일 수 있다. 루이제 린저는 할아버지의 눈을 빤히 들여다 본다. " 그 눈은 침착하고 고요했으며 간간이 얘기하는 사람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처럼 침착하고 고요한 눈은 세상에서 이미 정해져 있는 그러한 답을 제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눈은 성급하게 개입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 속으로 침잠하여 그 속에서 어떤 진실한 것을 끌어올리고자 할 것이다. 그 눈은 내면의 눈이자 타자의 내면성을 응시하는 눈이다. 그 눈 속에 담긴 내면성으로 닿고 싶어한다.

 

은밀하게 드러난 타자의 내면성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일상의 마스크를 벗고 내면을 은밀히 노출시키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그 내면에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어떤 '본능적' 충동을 일으킨다. 타자에 대한 감수성도 어떤 '본능적'인 생물학적인 것일까? 타자의 내면성은 마치 오랜 정원의 냄새처럼 또는 보들레르가 좋아한, 곧 사라져 버릴듯한, '존재의 스침'과도 같은 향기처럼 우리에게 와닿는다. 우리는 마치 냄새에 이끌린 듯 그 내면성을 향해 나아간다.

 

신경숙이 <외딴방>에서 "세상은 많은 골목들을 숨기고 있다'고 하고 있듯이, 세상의 골목들만큼이나 서로 상이한 수많은 내면성들이 있다. 그 내면성들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것은 그들의 새로움과 신비로움 때문일까?

 

 

 

“또 다른 유의 쾌감을, 나는 밤에만 외출하면서, 내가 옛날 햇볕을 받으면 가던 이 길들을 달빛 속에서 걸으면서 발견했다.” 달빛 속에서 걷는 쾌감은 이미 익숙해진 길의 모습들이 내면에 하나하나씩 다시 생경하게 와닿을 때, 낯선 새로운 모습으로 드러날 때의 쾌감이다. 달빛은 풍경의 색깔 전체를 바꿔버리는 힘을 갖는다. 익숙하지만 전혀 새로운 색깔로 나타나는 풍경은 포근하면서도 낯선 느낌을 준다. 익숙함과 생경함의 결합을 통해 그 풍경은 내 속으로 깊이 스며든다. 익숙함은 저항을 해체하고, 생경함은 부드러운 칼날처럼 내면으로 침투한다. 반면, 익숙하지 못한 생경함은 저항, 두려움을 가져오고, 또 생경하지 않은 익숙함은 무관심과 지루함만을 가져올 뿐이다.

그러한 ‘부드러운 새로움’의 예를 우리는 소설이나 시 속에서 종종 언급되는 저녁 안개 속에서 찾을 수 있다. 포근함과 새로움으로 귀가길의 행인들을 유혹하는 저녁 안개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을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이전에는 익숙했던 사물들의 감싸졌던 모습을 그러나 은밀히, 그리고 새롭게 드러내준다. 마치 하나의 익숙하고도 새로운 ‘세계’처럼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 속에 감춰졌던 동경을 다시 찾아내곤, 거리를 헤메인다. 오래전에 헤어졌던 애인을 만날 것 같은 기대로, 페데리코 펠리니의 <돌체 비타>의 마지막 장면에 문득 나타나는 소녀를 만날 것같은 기대감으로 즉, ‘고도’를 기다리면서, 그러니 저녁 안개는 우리를 오히려 우리의 내면 속으로 불러, 그 속의 풍경 하나 하나를 드러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저녁 안개는 우리의 내면에 말 걸어와 그 내면을 열어놓고, 그렇지만 아무것도 가져다 주지 않는다. 단지 우리 내면 속의 풍경들을 환기시켜줄 뿐이다. 자연은 단지 우리의 내면의 이미지들과 결합되어 있을 뿐이고, 실제로 그 자체로는 어떠한 내면성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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