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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소에 두고 온 시

N.A 바스베인스 지음, 표정훈 김연수 박중서 옮김, 『젠틀 매드니스 - 책, 그 유혹에 빠진 사람들』, 뜨인돌, 2006.


서치(書痴) '책에 미친 바보' - 이덕무산문선, 『책에 미친 바보』, 2005에서 본 단어이다. 책에 미친다는 것은 과연 즐거운 일인가. 정민선생의 '불광불급(不狂不及 ) -미쳐야 미친다'란 말도 함께 떠오른다.

오랫 시간을 두고 읽었지만, 지루하지 않게 꾸준히 시간을 두고 읽었다. 물론 책의 두께가 주는 무게감 때문인지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지치기는 했어도 그 흥미진진함이 벗겨지진 않을 정도이다. 48,000원이란 가격과 1111페이지에 달하는 내용(물론 책의 내용만으로는 848페이지 정도이지만) 들고 다니기가 버거울 정도의 두께이다. 얼마전에 사 놓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와 거의 비슷하다. 책꽂이에 두권의 책을 나란히 놓았두었더니 그 무게감이 가위 눌릴만하다.

나에게도 활자 중독증이란 놈이 있다. 정확하게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무언가 머리 아프게 복잡하거나, 심한 외로움을 느낄 때, 책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바쁠 때, 화장실에 있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등의 무기력한 시간에 책이 없으면 초조해지고 답답해진다. 핸드폰을 만지작 거려보기도 하고,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삶을 읽으려 노력해보지만 그것 역시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가끔은 무거워진 책들을 보며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만 막상 버리려고 하거나 누군가를 주려고 하면 마음이 무거워지고 손이 쉽게 가질 않는다.

그러면서도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거나, 작가다운 작가를 만나게 되면 그 흥분이 쉽게 가시지 않아 그 책들을 사서 모으고 읽어 나간다. 한 명의 작가에서 시작해서 그의 전작을 읽게 되는 경우가 많고, 이어 그에게 영향을 주었거나 그가 거론한 작가들까지 경계를 조금씩 넓혀 나간다.

『젠틀 매드니스』책에 미친 아니 그 강렬한 유혹에 빠진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고대부터 현재까지 자신만의 책을 모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일이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동일화하기 쉽지 않겠지만, 책을 좋아하고 빠져본자들에게 이것처럼 매혹적이고 강렬한 유혹이 있을까. 자신만의 목록을 만들고, 정리하고 그 책이 뿜어내는 냄새에 빠져 한참을 아무일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숨을 내쉬어보는 그 기분이란 어떨까. 누군가와 경쟁한다는 것조차도 기쁜 일이리라. 나에게는 없는 책을 보고 소유하고픈 욕구와 함께 그 책을 볼 수 있다는 작은 감동조차도 대단한 것이었으리라 막연히 짐작해본다.

때론 죽음과 함께 그 책을 보존하기 위해 도서관에 기증하거나, 아니면 그 기쁨을 나눠주기 위해 경매를 붙이는 일련의 행동들은 투자라거나 지극히 자기 만족적인 행동만은 아니었으리라. 누군가에게는 정말 하찮고 의미 없는 일인지 모르지만, 그것은 지극히 상대적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당장이라도 책들을 꺼내 목록을 작성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렸다. 목록을 작성하다보면 나의 책읽기에 대해서도 조금은 목적의식적으로 정리되지 않을까 싶지만 그런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 많지 않은 양이기도 하지만 나의 즐거운 책읽기는 아직 너무 많은 시간들이 남았기에 조금 더 이 잡식을 즐겨보기로 했다. 아마 시작한다고 해도 이 놈의 게으름 때문에 오래 가지 않으리라는 걸 내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책을 읽으면서 중간 중간 간지를 붙여 놓았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다시 읽어볼 듯 하지만 가끔 그 간지를 통해 그들의 이야기에 조금씩 조금씩 빠져보며 되새김질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리라. 쉽지 않은 번역이었고 쉽지 않은 출판기획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런 책들을 읽고 좀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 역시 즐거운 일 아니겠는가. 서치들을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 그러고 보면 내 주위에도 은근히 서치들이 있다. 바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