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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ism

지배와 그 양식들 memo 3

세계를 느끼고 받아들이는 능력으로서의 감수성은 곧 주체가 세계에 대해 자신을 열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것이다. 자신을 열어야지만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하므로 말이다. 이는 또 주체가 세계에 대해 자신을 열어야지만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하므로 말이다. 이는 또 주체가 세계에 대해 자신을 닫을 수도 있음을 말해준다.

주체가 세계에 대해 자신을 연다는 것은 주체가 열 수 있는 그 무엇을 갖고 있다는 것, 즉 내면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주체는 세상에 대해 자신의 내면성을 연다. 만약 내면성이 없다면 주체는 자신을 열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열어야 할 내면성이 없으므로 말이다.

감수성은 따라서 두 측면을 갖는다. '세계에 대한' 측면과 자신의 '내면성에 관한' 측면이 그것이다. 감수성은 세계에 대한 주체의 내면성의 열림이다. 그리고 이 열미의 겉으로 드러나는 형태가 바로 '만남'이다. 무엇에 대해 주체가 내면성을 열었다는 것은 주체가 그 무엇을 그저 스쳐 지나가지 않고 '만났다'는 것을, 멈춰 서서 '오래' 바라보았다는 것을 뜻한다. 이때 주체가 만난 그 무엇이란 어떠한 것일까? 그것은 단순한 사물적 존재는 아닐 것이다.

주체가 만약 한 그루의 나무를 '만났다'고 해보자. 그것은 주체와 그 나무 사이에 어떤 '교감'이 있었다는 것, 그 나무의 '숨결'이 주체의 내면성을 두드렸다는 것, 발터 벤야민이 '아우라'라는 개념을 통해 말하고 있듯이 그 나무가 주체의 시선을 되받아 주체에게 시선을 마주 보냈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예술작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예술작품은 다른 사물들과 달리 우리를 그 앞에 멈춰 세운다. 우리에게 무엇인가에 대해 말을 건네오기 때문이다. 말 건네오는 그 무엇을 우리는 만난다.

또한 주체가 감수성을 통해 타자를 만난다면, 그것은 타자의 무엇을 주체가 느끼고 받아들였다는 것, 주체가 타자의 그 무엇에 대해 자신의 내면성을 열었다는 것을 말한다. 주체의 내면성에 와닿는 타자의 그 무엇이란 주체가 이미 지니고 있는 세상에 대한 답들을 벗어나는 것이다. 이미 가지고 있는 답들에 부합하는 것이라면 굳이 내면성까지 열어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또 주체가 아마 내면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세상에 대한 세상의 답들이 결코 충분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주어진 답들에 의해 모든 것이 설명된다면, 자신만의 내면성이 자리잡을 수 없으므로 말이다. 그리하여 그 답들을 벗어나 주체의 내면성에 신호를 보내고 말 건네오는 타자의 그 무엇은 또한 그 타자의 내면성일 것이다.

그렇지만 주체는 세계에 대해 자신을 닫을 수도 있다. 세상과의 만남을 거절하는 것이다. 세상과의 만남을 거절하는 그러한 힘, 감수성과 대립하는 그러한 힘은 다름아닌 정체성 또는 달리 말해 자아이다. 감수성과 마찬가지로 주체 내부에 자리잡은 주체의 힘, 그러나 감수성에 대립하는 힘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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