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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ism

성적 지배와 그 양식들 - note 7


고통이란 엠마뉘엘 레비나스가 말하고 있듯이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 '참아낼 수 없는 것'이다. 고통은 그리하여 우리를 완전히 빨아들여 우리의 존재 자체가 된다. 즉 고통은 그리하여 우리를 완전히 빨아들여 우리의 존재 자체가 된다. 즉 고통은 바로 나 자체가 되고 그리하여 내 속에서 고통을 제외한 어떤 것도 남지 않게 된다.

우리를 고통으로부터 구출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시간이다.

우리가 시간에 의해 고통으로부터 구출받고 그리하여 고통에 대하여 성찰하기 시작한다면, 삶은 이제 더이상 동물학적인(더 정확히 말하면 기계적인) 자동적 과정이기를 멈춘다. 즉 동물학적인 자동적 과정처럼 전개되던 삶이 이제 고통의 경험 앞에서 문득 멈춰선다. 인생에 아무런 고통도 없다고 생각해보라. 그렇다면 삶이란 단지 자동적으로 전개되는 동물학적 과정에 불과할 것이다. 인간적인 성찰은 바로 고통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고통에 대한 성찰에 의해 인간은 동물학적인 자동적 과정으로부터 비록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일정게게 이탈할 수 있다.

고통을 당해보지 않은 자는 타자의 고통에 대해 결코 눈을 뜰 수 없다. 오직 고통을 당해본 자만이 타자의 고통을 같이 느낄 수 있고 또 그리하여 타자와 교류할 수 있다. 왜 그럴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타자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는 자는 타자의 고통 속에서 자신의 과거의 고통을 보는 것이라고 말이다. 따라서 고통당하는 타자를 돕는 것은 바로 자신의 과거를 돕는 것이기도 하다.

도로테 죌레가 "고난의 외마디에는 한 인간의 모든 좌절이 담겨"있다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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