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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ism

성적 지배와 그 양식들 - note 4


소유적인 '부르조아적 사랑'에 대한 대안으로 콜론타이는 그레타 마이젤-헤스(Greta Meisel-Hess)rk <성적 위기>에서 제안했던 '놀이
로서의 사랑' 또는 '에로틱 우정'을 내세운다. '놀이로서의 사랑' 또는 '에로틱 우정'은 타자에 대한 소유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그리하여 비극성이 부재하는 연애의 관계이다. 이러한 관계하에서 연인들은 단지 자신의 일부만을 타자에게 건네주고 그에 따라 삶이 훨씬 명료하게 된다는 것이다. 콜론타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놀이로서의 사랑은 엄격하다. 상호 호감의 기초 위에서 서로 접근하는, 상대방으로부터 삶의 미소만을 기대하는 존재들은 서로의 영혼을 고문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서로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을, 또는 내적 세계를 무시하는 것을 받아들이자 않는다. 놀이로서의 사랑은 서로에 대해 훨씬 주의력 있고 세심하고 성찰된 태도를 요구한다.

사랑이란 영원히 똑같은 상태로 지속될 수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 인정되고 오직 타자에 대한 존중과 성실성의 표현으로서의 투명함만이 요구될 뿐이다.

사랑의 시장의 출입자는 나르시스적 판타즘에 맞게 스스로를 포장하여 상품으로 내놓고 또 자신의 판타즘에 부합하게 포장된 타자를 사랑의 상품으로 구매하고자 한다. 이때 이러한 판타즘들이 자본에 의해 노동된다는 것은 물론이다.

 

 
앙켈레비치는 노스탈지아와 사랑의 형태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루베로 망명한 나폴리 사람이 나폴리에 대해 갖는 노스탈지아는 그다지 시사적이지 못하다. 왜냐하면 꼭 거기에서 태어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포질리프의 황홀한 해변을 애타게 동경할 많은 이유들이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유들에 의해 동기화된 그러한 그리움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멋진 카프리에 망명한 북유럽 사람이 북유럽에 대해 갖는 노스탈지아를 생각해본다면, 바로 그러한 노스탈지아야말로 순수한 형태의 노스탈지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인 것이다. 그 고향 이외의 어떠한 다른 동기도 갖지 않는 노스탈지아 말이다. 사랑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자가 자신의 연인에 대해 느끼는 근거 있는, 이유 있는, 정당화된, 마땅한 사랑이 잇는 반면, 사랑에 값하지 못하는 연인에 대해 느끼는 역설적인 사랑, 합당하지 않은 사랑도 있는 것이다. '사랑받을 만하다'는 것이 사랑의 원인일 경우, 우리는 결코 그러한 사랑이 이해관심을 벗어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을것이다. 원인론의 내용을 갖는 가치론은 사랑 또는 노스탈지아가 순수한 것인지를 확고하게 결정하는 것을 방해한다. 노스탈지아와 사랑이 순수하기 위해서는 외재적인 원인이나 이유가 없어야 한다.

아름다운 남쪽의 도시에 망명한 자가 춥고 황량한 북구의 초라한 마을에 대해 갖는 노스탈지아처럼 말이다. 그러한 사랑은 바로 그 사랑받는 자가 어떤 사랑받을 만한 이유도 갖지 못하기 때문에 바로 그 '순수한'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