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발소에 두고 온 시

강영숙, 『빨강속의 검정에 대하여』, 문학동네, 2009


안녕하세요? 당신에 대한 안부를 묻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잘 알고 있지만,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지 모를 때 습관처럼 사용하는 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답니다. 이 물음에 대해 아무런 대답하지 않을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답니다. 지금 내가 사용하는 이 문체 또한 당신의 「스쿠터 활용법」을 차용한 것 역시 잘 알고 있을 테지요.

어제는 4월 중순인데도 불구하고 눈이 내렸답니다. 얼마전 아파트 단지앞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목련과 천변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는 개나리에 감탄했었는데 말이죠. 어제 창밖으로 떨어지는 하얀 눈송이들을 보고 벚꽃잎이 떨어지는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졌습니다. 그런가봐요. 사람이란 머릿속에 습관처럼 길들여진 기억속에 살아가는 존재라는 걸. 당신의 책을 읽으면서 내가 느꼈던 머뭇거림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었을겁니다. 책을 읽으면서 혹은 한편 한편 끝마치면서 느끼는 묵직함. 일반적인 소설화법과는 다르게 당신의 소설에서는 인과관계는 중요하지 않아요. 단지 그런 묵직함과 약간은 당황스러울수도 있는 이야기들이 나를 무겁게 내리누르더군요

그건 마치 4월에 내리는 눈 같아요. 분명히 머리와 몸은 4월인데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4월의 것이 아니었거든요. 당신의 소설속에 나오는 사람들 역시 현실속에 살고 있는 인물들인데 그들은 항상 현실과 몽상의 경계속에서 흔들리고 있어요. 그 흔들림의 기억들이 바로 우리들의 진짜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누구든지 그렇게 살고들 있을테지요. 다만 그렇다고 믿지 않을뿐이죠. '난 다르지 않아'라고 조용히 읊조리는 건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또 다른 변명인걸요.

이 책의 제목을 보며 참 많은 생각을 했어요. 빨강 속의 검정은 어떤 것일까. 아마 여기에서의 빨강은 원초적인 느낌의 진한 빨강이 아니라 눅눅하고 약간은 무거운 느낌의 빨강이라는 생각을요. 검정 역시 그와 비슷한 느낌을 줄테구요. 그건 지금 나의 심리상태와 아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최인훈의 소설제목 『회색인』이 주는 느낌과 비슷하기도 하고요. 『회색인』소설을 읽으며, 책의 내용과 제목이 참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당신의 책 역시 제목과 아주 잘 어울리는 내용과 그림을 가지고 있어요. 아마 당신의 책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당장이라도 그 그림에서 피가 뚝뚝 떨어질것 같아요. 4월의 목련꽃이 무거운 꽃잎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검으면서도 빨간 핏물이 땅으로 뚝뚝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을요. 아마 그 핏물은 땅으로 떨어져 내려 또 다른 그림을 그려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