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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소에 두고 온 시

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 문학동네, 2009


표지의 사진이 너무 인상적이다. jonna linda의 self portrait라고 한다. 바람이 있고, 하늘과 구를 펼쳐진 들판 흩날리는 머릿결. 그리고 그녀의 시선.

김연수가 장편을 썼다고 하길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어렵든』을 출판이 되자 마자 기대감을 가지고 읽었던 기억이 있다. 분명히 지금 시대의 주목할 만한 작가임에 틀림없다. 『뉴욕제과점』의 기대할 만한 소설가에서 이제 작가라 불리워도 손색없을만큼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아직 김연수의 소설은 단편에 더 훌륭하다. 더하거나 뺄 구절 없이 하나하나의 문장에 충실하다. 그 문장들은 꿈틀거리며 나를 찌른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묵직함이 문장속에 오롯이 살아난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나의 삶은 어떠한가' 기억이란 것 역시 나의 주관에 의해 여러모로 착생되어버린 박제와 같은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가끔 오래전 친구들을 만나 옛이야기를 하다 보면, 동일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억과 나의 기억이 불일치하는 지점을 만나면 당황스럽다. 같은 시간속에서 그와 내가 함께 했지만 그 기억의 존재양식은 너무나 다를때 느끼는 허허로움이란. 아마 우리들의 관계도 그러했을 것이다. 같은 공간속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했지만 그가 받아들이는 것과 내가 기억하는 것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것은 설명따위로 이해되기 힘든 성질의 것이리다.

그렇기 때문에 흔적을 남기기 위해 애쓰고, 그 흔적속에서 자신만의 기억을 되살리고자 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불완전함을 알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지 않은가.

이 소설을 읽으며 나름대로 정리하고자 했으나 마땅히 쓸 말이 없다. 쓸 말이 없다기 보다는 어떤 말을 쓰더라도 이 소설들에 대해 내가 가진 생각과 흔적의 덩어리들을 설명할 말들이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입밖으로 내어지는 순간 그것은 이미 나의 기억과 다르게 표현되리라는 두려움. 역시나 글을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난 작가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가지면서도 그들이 두렵다.

"우리가 지나가고 난 뒤에도 저 불은 우리의 예상보다 좀더 오랫동안 타오를 것이라느 사실을. 우리 안에서. 내부에서. 그 깊은 곳에서. 어쩌면 우리가 늙어서 죽을 때까지도. 이 우주의 90퍼센트는 그렇게 우리가 볼 수 없는, 하지만 우리에게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는, 그런 불들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물론 우리는 그 불들을 보지 못하겠지만.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p32

한 삼십 분 정도 달렸을까, 호수 반대편까지 달려갔을 때는 온 몸이 다 젖었고 운동화로는 물이 스며든 상태였지만, 그때부터 비가 그치기 시작했다. 문득 바람이 불어오는 서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는데, 거기 서쪽 하늘은 환해지고 있었다. 서쪽 하늘은 검은 빛이었고, 어떻게는 푸른빛이었고, 또 달리는 하얀빛이었는데, 그게 하도 인상적이어서 나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가만히 서서 한동안 그 풍경을 바라봤다. 하늘 전체를 뒤덮은 구름은 빠른 속도로 밝아지고 있었고, 지평선에서 한 뼘 정도 위쪽으로는 날이 개리라는 걸 암시하는 뭉게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비구름이, 그 다음에는 바람이, 그리고 저녁이, 또 계절이, 그렇게 한 시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지나가는 그 풍경 속에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이 다 들어 있는 것 같았으므로 오히려 나는 숨이 편안해질 때까지, 바람이 젖은 내 몸을 차갑게 만들 때까지,  바람이 젖은 내 몸을 차갑게 만들 때까지, 나뭇잎에 매달린 빗방울들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후드득 떨어져 내릴 때까지, 그리하여 그 구름들 틈새로 푸르스름한 하늘이 엿보이게 될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나는 그날이 바로 장마의 마지막 날이라는 걸 때달을 수 있었다. 그 서쪽 하늘을, 그 뭉게구름을, 그리고 울퉁불퉁한 둥치와 물방울이 맺힌 나뭇잎을 지닌, 하지만 홀로 서 있는 키가 큰 메타세쿼이아 한 그루를 바라보다가. 「세상의 끝 여자친구」pp7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