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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사랑

자주 풀리는 왼쪽 운동화 끈


요즘 들어 부쩍 왼쪽 운동화 끈이 자주 풀린다. 걷다 보면 운동화가 헐거워진 느낌이 난다. 운동화를 내려다 보면 여지없이 왼쪽 운동화 끈이 풀려 있다. 워낙 자주 풀리기에 한번은 아주 세게 묶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몇번씩 풀려 있다. 헐거워진 느낌에 다시 운동화끈을 조여 매고 발을 세게 바닥에 구른 다음 걷기를 계속한다. 조금은 세게 묶인듯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시 운동화끈을 묶지 않는다. 잊고 지내다 다시 헐거워진 느낌이 나면 또 운동화 끈이 풀려있다. 마치 그 동안 무언가를 잊고 지냈으니 그걸 기억해내라고 하는 듯 나에게 운동화의 존재를 끊임없이 알려주는 느낌이 든다. 모든것이 꽉 짜여진 채 돌아가는 시간속에서, 운동화 끈을 묶는 그 시간만큼은 멈춰진 햇살같은 느낌을 준다. 일요일 아침 햇살이 머리를 향해 '나 여기 있어요'하며 존재를 알리는 듯 하다.

어제 저녁 그녀는 나에게 물었다. 오늘은 무슨 색 팬티를 입었니? 그래서 난 파란색 물결무늬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오늘 하루는 그걸 생각하겠다는 말을 했다.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그런 질문을 던진 그녀의 의도에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다. 나 역시 갑자기 그녀의 팬티 색깔이 궁금했다. 그녀에게 돌아온 대답은 살색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검은색을 즐겨 입는다는 말을 했다. 특별한 무늬가 없는. 갑자기 들었던 생각과 조금은 어색한 대화였지만 꽤 인상적인 대화였고, 그 대화에 빠져 오후의 상념에 빠져 들었다.

사랑하는 데에는 두가지 부류가 있다. 하나는 사랑을 받는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랑을 주는 것에 행복해 하는 자. 나는 후자에 속한다. 아마 외모나 말솜씨나 후자를 가져야만 살아남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럴것이다. 오랜시간동안 사랑을 받는것보다 주는것에 더 익숙해져 있다. 그리고 그런 소소함에 조금은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습관처럼 되어버린 사랑에 대한 익숙해짐에 따라 마치 이젠 내 몸의 일부가 되어버린 듯. 어제 저녁 잠에 들기전 그 아이에게 문자를 받았다. '유에스비자꾸깜빡해서죄송해요내일꼭드릴게요~' 10시 21분에 온 문자. 그러나 내가 확인한건 12시 40분쯤. 한참을 고민했다. 그 고민의 정체는 왜 문자를 보냈을까에 대한 의미해석에서부터 답장을 해야하나. 하지 않으면 어떻게 생각할까 따위의 것들. 이런저런 생각속에서 문자를 입력하고 발송했다 '이제야 확인했다. 천천히 줘도 된다.' 한동안 전화기를 옆에서 떼어내지 못했다. 지금은 아무렇게나 팽겨쳐 놔 버린다. 전화기에 특별한 문자는 없었다. 주말엔 하루종일 전화를 쳐다보지 않는다. 심지어 이틀을 내버려놓아도 아무런 문자가 없다.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건 사랑을 주는 건 아마도 긴급자금이 필요하지 않냐고 물어보는 문자들뿐이다. 그들에게 사랑받는 존재인것이다. 난.

잠이 온다. 요즘 들어 자꾸만 잠이 온다. 잠에 들거나 깨어났을때 주는 잠깐의 멍한 느낌이 좋다. 머리속이 복잡하지 않다. 그 멍한 느낌에. 신발끈이 풀려오는 건 자꾸 나를 건드린다. 일상의 상태에 빠져 하루를 보내는 그 시간에 나를 건드린다. '누가 오늘도 나를 참 많이도 생각하는구나!' 자꾸만 풀리는 왼쪽 신발끈은 누군가가 나를 생각해주는 신호라는 잠언에 빠져 잠시 행복한 기시감에 '풋'하고 웃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