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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ism

성적 지배와 그 양식들 - note 2


사랑을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디오티마의 말에 따라 종의 재생산을 위해 생물학적으로 프로그램화된 힘이라고 한다면, 사랑은 생명현상의 하나이다. 죽음의 공포 또한 생명의 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생명 현상이라고 할 때, 생명 현상으로서의 사랑은 또다른 생명 현상인 죽음의 공포에 굴하지 않는 강력한 힘이다. 문제는 이처럼 강력한 힘을 지닌 사랑이 전혀 예기치 못한 시점에서 돌발적으로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의 가부장제화는 이미 중세 유럽에서 부부간의 사랑의 비대칭성이란 형태로 나타난다.

예컨대 자크드 보라진느에 따를 때 아내는 남편에 대해 ‘완벽한 사랑’을 행해야 하되 남편은 아내에 대해 ‘절제된 사랑’이란 열정으로부터 벗어난 판단하는 사랑이다.

이처럼 남편에게 ‘절제된 사랑’이 권해지는 것은 왜 그럴까? 그것은 물론 여자와의 열광적 사랑에 빠져서 남성의 지배권력을 상실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사랑의 힘은 너무나 강력해서 사랑에 완전히 빠지게 되면 남성의 지배권력이나 남성적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 정도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정으로부터 벗어나 ‘판단을 하라’는 것은 자신의 자아를 잃어버릴 수 있는 사랑의 상황으로부터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남성적 정체성을 지키라는 것이다.

반면 여자에게 열정적인 완벽한 사랑을 권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열정적 사랑이 사랑의 대상에 대해 자신의 자아마저 포기하는 헌신적 상황을 도출하기 때문이다. 이때 헌신적 상황이란 실질적으로는 예속적 상태에 다름아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열정적 사랑이란 헌신을 매개로 하여 손쉽게 사랑의 대상에 대한 예속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여자에게 남자와는 달리 열정적 사랑이 권해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남성공동체는 자신의 성원들을 사랑으로부터 보호하려한다. 그 방법은 사랑을 별볼일없는 것으로 ‘주변화’하는 것이다. 특히 남성공동체의 연대성이 남성성의 덕목을 공유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때, ‘사랑의 주변화’는 사랑을 여성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방식으로 행해진다. 즉 사랑은 여성적인 것이기 때문에 남자들이 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이 주변화되고 여성이 열등화하면서 여성은 욕망의 대상이 된다. 즉 여성은 ‘사랑의 대상’에서 ‘욕망의 대상’으로 열등화하는 것이다. 도구화하여 다루어도 될 사물적 존재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남자들은 이제 자신의 성적 욕망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여성에 대한 사랑을 철회할 수 있게 되었다. 여성은 이제 헌신적 사랑의 대상이기를 그치고 그저 성적 욕망을 실현해주는 매체(support)에 불과한 존재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여성은 ‘정신’을 박탈당하고 오로지 ‘몸’만 부각되게 된다. ‘정신’은 사랑을 끌어들일 힘을 가지고 있는 반면, 몸은 오로지 욕망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정신은 존중의 대상인 반면 몸은 소유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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