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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소에 두고 온 시

김경욱, 『동화처럼』, 민음사, 2010


비가 오는 날이었다.


문득 그 아이가 보고 싶어졌다.


비는 언제나 그렇듯 외로움과 그리움의 눈매를 가지고 있다.


비와 함께 떨어지는 비의 흔적은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 그것도 아주 매섭게


차를 집이 아닌 그곳으로 돌렸을 때,


익숙해진 기억의 흔적들이 이렇게도 오랫동안 몸에 남아 있을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때론 머리의 기억보다 몸에 기억되어 있는 미세한 움직임들이 더 강하고 또렷하다는 걸 새삼 다시 느낀다.


비는 조금씩 약해지고 있었지만 그 흔적의 덩어리들은 그 어느때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그 아이의 아파트 앞에 차를 세우고, 라이트를 끄고 와이퍼의 작동을 멈추자 빗방울들이 차창을 때리기 시작한
다.


나무 밑에 차를 새워놓은 탓인지 지붕위로 들려오는 빗방울 소리는 더욱 크게 들린다.


후두-둑 하고 지붕을 때리는 소리는 리듬악기의 연주를 듣는 것 같다.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니 어둠속에 도드라지는 담배불이 얼굴까지 붉게 만든다.


연기는 열어놓은 창밖으로 흘러 나가고, 팔에는 비의 감촉을 잊지 말라는 듯 차가운 흔적을 남긴다.


가방속에서 책을 꺼낸다. 나의 기다림은 언제나 책과 함께이다.


책을 오래 읽을 수 없는 기다림이지만, 책이라도 곁에 두지 않으면 그 허허로움이 더 나를 옭아맨다.


책 몇장을 읽는다. 하지만 시선은 언제나 창밖으로 고정되어 있다.


내가 그 아이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각인이라도 하듯.


책을 들고 있다는 것이 우습기도 하지만, 뭐라도 집중하지 않으면 그 공허함이 주는 무게감에 기다림이 주는 아련함을 미쳐 만끽하지 못할 것 같다.


한 동안은 그 아이에 대한 기억들과 추억이라는 편린에 빠져 힘들어 하고 안타까워 했다.


그 무심한 흔적들을 바둑을 복기하듯 하나씩 반추하며 떠올리기도 했다.


가끔은 그 상념들 속에서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그 흔적들을 떨구어 버리려 했지만


오롯이 살아나는 기억들의 음험함에 아파하고 슬퍼해본 자만이 그 감정이란 놈의 무서움을 느낄 수 있으리라


잊기위해 미친듯이 책을 읽었고, 음악을 들었으며, 커피를 마시며 밤을 지새우기도 했지만 그런다고 세상이 달
라진다면 세상은 너무 재미없는 곳이겠지


언제였던가


이런 생각과 감정들 속에 파묻혀 가슴 떨렸던 기억이


그 아이에 대한 생각은 그간 내가 잊고 지냈던 상처의 미묘한 흔적들이며 떨림의 기억들이다.


그 하얀 목덜미에 남아있는 관심 갖지 않으면 지나칠 수 밖에 없는 작은 솜털의 흔적


그 아이만이 가지고 있는 향기,


숨을 쉬면 조용히 귀 기울여야만 들리던 그 숨소리는 왜 이리 나의 가슴을 긴장시키며 떨리게 만들었던지


기다림이란 그런것이다.


그 아이가 나타나는 것 역시 중요한 것이지만 그 기다림의 순간 속에서 나를 찾는 것


잃어버린 나의 모습을 찾아 스스로 행복해하는 것.


차에 시동을 다시 걸고, 아쉬움을 뒤로 하며 돌아서는 순간


그 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시간은 흐르고 내 옆에 있던 그 아이는 아니었건만


그 모습만으로도 가슴이 다시 설레이는 건 왜일까.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이 이런것일까.


그 순간 그 아이가 나를 보았느냐 보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이다.


어쩌면 그 순간 길에 나가 우산을 받쳐들고 환하게 웃음짓는 나를 보고 그 아이가 달려드는 순간이


영화속의 드라마틱한 장면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이란 이런것이다.


비가 내리는 밤 우산을 들고 자신의 집을 향해 들어가는 그 아이의 모습을


쓸쓸히 바라보며 슬핏 웃음지으며 조용히 시동을 걸고 자리를 뜨는 것 말이다


적어도 내가 갖는


기억의 향기와 정서는 그래야만 했다.


오래도록 가슴에 저미는 아픔속에서 스스로를 단련시키는 것.


그 속에서 커 왔고 사랑했고 그리워했다.

 

2010년 비오는 어느 날 밤

 

 『동화처럼』은 그런 책이었다.


김경욱의 그간의 작품들이 그랬던 것처럼, 타고난 이야기꾼으로서의 입담이 그에게 느껴진다. 여유롭고 상황에 대해 적절히 가지고 놀줄 안다는 느낌이 든다. 김경욱의 소설을 계속해서 읽는건 그런 재능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어린 시선인지도 모른다. 이번 작품 역시 쉼없이 읽혀나간다. 제목처럼 동화속 이야기가 바닥에 깔려 있지만 그리고 그 동화처럼 되어 갈거야 라는 기대감이 소설을 읽는 내내 머리를 맴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긴장은 늦추어지지 않는다.

한 남자와 그리고 한 여자
그 두사람의 엇갈린 행보와 만남들은 나를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을 긴장시킨다. 모두라기보다는 그런 옛스러운 감정에 빠져 본 자에게는 더더욱. 그랬기에 쉼 없이 읽어나갈 수 밖에 없었다. 제발 제발 하면서 나도 모르게 그들에게 동조하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이다. 소설 속 결말과 다르게 또 그들은 현실속에서 이전과 다름없이 살아갈 것이다. 다만 우리는 믿고 싶을뿐이다. 행복할 것이라고. 아마 오랜 시간이 지나 그들이 늙어 함께한다면 지는 노을을 보며 이렇게 말하겠지. 그래도 우리 참 잘 살아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