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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사랑

홍상수 감독, 하하하 를 보고.



고다르의 영화철학에 의하면 현실을 보여주는 순수한 이미지는 존재하지 않으며 현실에 대한 기억 속의 몽타주를 통해서만 진정한 이미지와 역사를 얻을 수 있음. 따라서 서로 다른 기원과 서로 다른 방향을 갖고 있는 여러 이미지를 통한 연상은 새로운 정서를 불러일으키며, 또한 서로 다른 이미지들의 몽타주가 각자의 기억 속에서 다르게 조합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의미는 하나로 해석될 수 없음. 그 결과 고다르는 "이미지는 올바른 이미지가 아니라 단지 하나의 이미지일 뿐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됨.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난 후 고다르의 이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러면서 영화속의 김강우와 유준상의 대화처럼 나도 '어쩔 수 없는 존재'라는 자괴감이 들며 설핏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김상경의 손짓과 과장되지만 너무나 현실같은 모습에 웃음이 나며, 그 손을 영화보는 내내 집착하게 되었다.

문소리의 연기는 늘 실제 같다. 연기한다는 느낌보다는 영화속의 '그 사람' 같다. 철저하게 계산되어지고 영화안에 등장하는 배우라기 보다는 마치 내 눈으로 '그 사람'을 보고 있는 듯한 자연스러움. 어찌 보면 공포스러울 정도로 끔찍한...

거기에다 모텔앞에서 엎어준다는 장면에서는 거의 쓰러질 뻔 했다. 아마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면, 웃으면서 데굴데굴 굴러버릴 뻔했다. 내가 뽑은 이번 영화의 백미였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보면 꼭 이런 '잔인한(?)' 장면들이 있다. 조금은 의아하면서도 '꼭 그럴것만 같은' 이라고나 할까.

참 영화를 시작하는 유준상과 김강우의 '좋은 일만 이야기'하기는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을 떠올리게 한다. 포장마차에서 자기만 아는 이야기를 꺼내는 두 젊은이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아니면 우연일까. 그 무엇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어쨌든 둘의 이야기가 교묘하게 겹쳐지는 장면을 통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걸 영화 속의 장면으로 보니 조금은 색다르게 느껴졌다. 만날듯 만나지 않은 드라마속의 '가증스러운' 코드들의 답습에 비하면 이 영화속에서 '그럴수도 있겠다'로 이해하게 되니. 이것만으로도 그의 영화는 충분하다.

우연찮게 영화가 끝나고 김영진 영화평론가와 촬영감독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영화가 끝난 후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데 아무도 나가지 않길래 내심 홍상수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수준은 역시 다르구나 느꼈는데 나만의 착각이었다. 무비톡이라는 행사가 있었는데 나를 포함한 몇몇 사람만 모르고 들어왔나 보다. 덕분에 영화촬영에 대한 에피소드나 촬영감독의 의도등을 곁다리로 들으며 영화를 보는 내내 놓쳤던 것들을 되새김질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통영에 대한 이야기여서 대단히 예쁜 장면들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영화속에 표현된 그곳은 진짜 '통영'이었다. 영화속의 배경이 아니라 내가 가보았던 '통영' 그대로 였다. 바닷가, 시장, 그리고 골목길, 모텔 등. 어느 하나 새롭지 않았다. 아마 통영이 아니라 그 어느곳이라고 해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홍상수 감독에게 있어서는 배경조차도 그냥 눈에 보이는 것 그대로였으리라는 생각이 드는건 왜일까. 이런 영화를 보게 해 준 그에게 고맙다. 아니 영화가 아닌 그들의 이야기를 지켜볼 수 있게 해준 그에게. 난 영화를 본게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속에 잠시 들어갔다 왔을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