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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소에 두고 온 시

이현우, 『로쟈의 인문학 서재』, 산책자, 2009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또다시 나의 비루함에 고개 숙일 수 밖에 없다. 그 비루함의 정체는 내가 가진 지식의 허울을 다시 끄집어올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분야에 내공이 깊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분명히 경이로움이다. 하지만 이렇게 책(인문학)에 대한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경이로움을 뛰어넘어 내 자신이 한없이 작아짐을 느끼게 된다. 작년 신형철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를 읽었을 때 느낀 전율을 다시 이 책에서 느끼게 된다. 이 전율은 나를 나락으로 내몬다. 그 나락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음험한 논리의 덫에서 헤맬 수 밖에 없는 막막함이여. 이름난 대가들의 말속에서 느낀 두려움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 두려움은 어둠속에서 갈길을 잃어버린 자의 그것이었다.

 어려움에 처한 인간에게 아무런 말도 할 게 없는 철학의 무능력 자체는 바로 우리의 무능력을 닮은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무엇을? 내던져지고 내팽개쳐진 각자의 운명 속에서, 각자의 눈물 속에서 의미있는 일반 이론, 즉 연대를 끌어내는 일 말이다. 개인의 울음을 집단의 통곡으로 바꿔놓는 일 말이다. 언젠가는 .......... 글을 쓸 때마다 시오랑의 일화를 자주 되새기곤 한다. 적어도 내가 살아온 삶의 내적 요구에 부응하는 주제들에 대해서만 쓰겠다는 것. 그건 책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살아온 만큼 살아가기도 해야 한다는 것. 어쨌거다 당분간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 이건 또 다른 요구다. 이 두 가지 요구 사이에서 나는 가랑이가 찢긴다. 나는 즐겁게 미칠 지경이다. 당신은 사정이 좀 나은가? p409~410

 나 역시 즐겁게 미치고 싶다. 책에서든 삶에서든.

 이데올로기의 하찮은 대상 : 여성 음모의 세 가지 스타일에서 우리는 동일한 기호학적 삼각형을 만나지 않을까? 무성하게 자라 헝클어진 음모는 자연적 자발성을 존중하는 히피족 여성의 태도들 가리킨다. 반명에 여피족 여성은 잘 가꾸어진 '프렌치 가든'형을 선호한다. 그리고 펑크족 여성의 경우에는 음부 전체를 면도해버리고 고리를 달아서 장식한다. 더불어, 이러한 삼각형의 구도는 레비-스트로스의 기호학적 삼각형 버전으로 말하자면, '날것'으로서의 무성한 음모, 잘 손질된 '구운'음모, 완전히 면도한 '끓인'음모에 대응하지 않을까? 이러한 사례들까지 동원하여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우리가 자신의 신체에 대해서 갖는 가장 은밀한 태도조차도 이데올로기를 '발언'하고 '실천'한다는 것, 그러니 누가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말하는가? p319~320

 나의 이데올로기는 어디인가? 날것-구운것-끓인것, 보수주의-혁명적 급진주의-온건한 자유주의, 나-나-나 중에서 어떤 나로 살아갈것인가!

 로쟈의 책에서 내가 얻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오랜 시간동안 고민해볼 문제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나란 존재에 대해 다시 되묻고 싶다.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