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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사랑

이창동 감독 「시, poetry, 詩」


라드부르흐 공식 :

입법된 후 권력에 의해 안정된 실정법은

그것이 부당하더라도 정의에 우선한다.

다만, 실정법과 정의가 도저히 허용할 수 없을 정도로 모순될때에는

정의가 우선한다.



며칠째 비가 내렸다.

오늘 아침 구름 사이로 오랜만에 햇살이 보인다.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로 깨끗한 하늘이

출근하는 길 여느때처럼 도로는 딱딱한 벌레의 등껍질같은

차들로 가득하며 각자 자신들의 일자리로 일자리로 향하고 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길래 저리 바쁘게 움직일까'

하지만 그저 이건 반복되는 일상일 뿐이다.

나에게도 그들에게나 그냥 일상이다

비가 오는 날, 바람이 불어 내 머리를 흩날리는 순간,

떨어지는 꽃 잎이 내 발 앞에 떨어지는 찰나

풍경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의 움직임 그리고 흔적

눈은 점점 희미해져 간다.

'알츠하이머 병-치매' - 처음에는 명사를 잃어버리고 다음에는 동사를 잊어버린다. 오늘 보이는 풍경 속에서 난 명사를 잃었고 그 흐름속에서 동사를 부여잡으려 애쓴다. 하지만 손안에 움켜쥔 물처럼 내 손가락 사이를 스물스물 빠져나가는 그것을 본다. 천천히 흔적을 남기지 않고. 다만 내 머리가 기억하고 잇는 감각의 미끈함만이 거기에 있을뿐.

이창동에 대한 기억 하나는 『녹천에는 똥이 많다』라는 소설이었다. 제목이 강렬하여 소설의 내용보다 제목에 대한 기억이 더 오래간다. 그리고 영화감독으로의 변신. 영화가 찍고 싶었다는 그의 말. 영화감독이 된 지금 그에게는 어쩌면 소설같은 영화, 영화같은 소설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초록물고기」에서 보여준 집착. 영화의 초반부에 머플러가 바람에 날리는 강렬함은 아직 어설프지만 그렇기에 강렬하다.

문광부 장관으로서의 예기치 못한 행보. 그러나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의 '그다운 행보' 그것이 그의 모습이었다.

「시」는 철저하게 계산되어 있다. 하나 하나의 장면에 불필요함이 없다. 그에게 장면에 관한 미학. 영화에 대한 여러 계산들보다 더 중요한 건 내러티브인지도 모른다. 전경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인물과 소품까지도 그냥 흘려버리기 힘들다. 담배를 피며 무슨일이 일어났느냐 하며 쳐다보는 방관자이자 응시자의 강렬한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든다.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 사람이 눈에 띄며 기억에 남는 건 예사롭지 않다.

버스를 타고 가는 장면의 속도감. 흘러가는 시간 속에 문득 정지된 것 같은 배우들의 모습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음악 조차도 찾아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처연하다. 젠장. 이야기하지 않으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난 자꾸 이야기가 보인다. '저기 봐봐!' 저기에 있잖아 하는 소리가 계속 들린다.

강연회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청강생들. 그건 시에 대한 이야기이며 우리 삶에 대한 이야기다. 나의 이야기다. 그의 이야기다. 동시에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영화의 흐름은 마치 시를 쓰는 과정과 동일하다. 보며 느끼며 생각하며 하얀 백지위에 잘 깍아놓은 연필을 내려놓은 듯. 무엇을 써야 할지 어떤 단어로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써야 한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영화의 초입에 옆자리에 앉아있던 커플이 끊임없이 팝콘을 먹는다. 팝콘을 찾기 위해 부스럭대는 소리. 입으로 들어가 부서지는 팝콘 소리. 들으려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들려오며 나를 자극하는 그 소리. 그 소리에 신경이 쓰이며 잠시 주의를 줄까. 아니면 그 팝콘통을 들의 그의 머리에 살포시 부어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잡것들. 내가 날카로운 것일까. 그날 유난히 신경이 쓰였다. 나의 몰입을 방해하는 그 소리에 신경질이 났다. 사는 건 그런거다. 타인에 대해 고려하지 않음. 나 역시 그럴것이다.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이니까. 이 영화를 이해하려 하지 마라. 자신이 보는 대로 보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