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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ism

성적 지배와 그 양식들 - note 6

정체성은 심리구조의 매우 깊은 심층에 자리잡고서 우리의 존재 자체를 규정한다. 그런 만큼 정체성은 의식을 벗어나 있고 따라서 자동적으로 우리의 행위를 규정한다. 정체성이 우리의 존재 자체를 규정하는 만큼 정체성의 붕괴는 곧 존재의 붕괴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니 정세성의 끈질김이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것이다. 프로이트가 '자아의 무의식'이라 칭한, 심리의 심층에 자리잡은 정체성은 자신과 모순되는 모든 것들을 표면적 의식에게 허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허용은 단지 무의식적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일 뿐이다.

인간적 '선'은 실질적으로 모두가 '위선'이다. 첫째로, 모든 '선'은 자기 중심으로 설정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 동물의 나르시시즘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자신을 항상 '선'한 것으로 간주하게 하고 타자들은 언제나 '악'한 것으로 설정하기 때문이다. 또 그리하여 '선'으로 판단되는 모든 것은 자기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모든 '선'하다고 칭해지는 것은 그 자체가 '선'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처럼 칭해지기 위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선'한 행위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때 '어떤 것'이란 자기자신을 장식하기 위해서 행해지는 것,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행해지는 것이거나 아니면 자기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진정한 선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언어이전적으로 존재할 따름이다.

사실상 인간세계에서 '선'이라고 주장되는 많은 것들은 실질적으로는 '선으로 전도된 악'의 성격을 갖는다. 그리하여 그러한 '선'이야말로 오히려 가장 혐오스런 인간적 '악'을 구성한다. 즉 스스로를 '선'으로 표상하는 그러한 악은 인간 이외의 자연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우 인간적으로 특수한 악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악은 동물적인 악이면서도 인간 동물에만 특수한 악이다. 타자에게 고통을 가하는 가해자들, 즉 악행을 하는 자들이 스스로를 '선'이라고 표상하는 그러한 악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는 지배계급에 의해 자행되는 '선으로 전도된 악'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선'으로 내세울 때 그 대부분은 바로 '선으로 전도된 악'인 것이다. 왜냐하면 타자를 악으로 분류하고 자신을 선한 것으로 간주하려는 바로 그 태도 자체가 악한 것이기 때문이다. 타자들에게 악을 부과하는 가해자들은 이데올로기를 통해 스스로를 '선'으로 표상한다. 이데올로기들의 체계로서의 사회란 바로 '위선의 체계'에 다름아니다.

 

유년의 지각양식은 일종의 시적 지각양식이다.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은 <시란 무엇인가?>라는 짧은 논문에서 시를 정의하는 것의 어려움을 언급하면서, 그러나 모든 시를 관류하고 있는 일정한 '시적 기능' 또는 '시적속성'이라는 것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를 때 '시적 속성'이란 바로 "단어를 단어처럼 느끼게 해주는 것" (que le mot est ressenti comme mot)이다.) 대상이 단어를 벗어나고 단어가 대상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시적 지각양식은 언어가 말해주지 않는 것을 우리레게 전달한다. 이 말은 우리가 시적 지각양식을 통해 세계에 다가설 때 세계의 사물들은 언어 속에서 자신을 감추는 것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자신의 내부를 열어놓는다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림을 그릴 때 축축한 그림 속의 풍경을 내 손으로 붙잡으면, 사물들은 나에게 그들의 내부를 열어 보이지 않았던가. 비누방울 놀이를 할 때에도 나는 비슷한 느낌을 받곤 하였다. 비누방울을 만들면, 나 자신은 비누방울속으로 들어가서 - 둥근 지붕이 파열할 때까지 - 둥근 세상의 색채 놀이에 뒤섞이지 않았던가.

그렇다. 시적 지각양식에 대해 사물들은 자신들을 열어놓는다. 언어를 통해서가 아니라 언어이전적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언어 이전적 '열림'은 또한 하나의 다른 언어이기도 하다. 벤야민이 말하고 있는 유년의 언어 말이다. 그러한 열림은 어린이의 내면 속으로 파고 들어와 그 내면을 변화시켜놓는다. 다음과 같이 말이다.

나는 그 정자를 사랑하였다. 그 안의 창문을 하나씩 색칠하노라면, 나는 내가 변모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창문에 비치는 풍경이 대로는 아름다우며 때로는 먼지투성이가 되고, 때로는 메마르고 때로는 초목이 무성하듯이, 나 역시도 그러한 풍경처럼 물들여졌다.

그러나 여기서 순서를 뒤바꾸어서는 안된다. 세계가 먼저 열리고 그 다음에 내가 열리는 것이 아니다. 유년의 시적 지갓양식은 그 자체가 벌써 언어의 닫힘에 대조되는 하나의 열림이다. 나는 시적 지각양식에 따라 나 자신을 세상에 대해 열어놓는다. 그러면 이러한 나의 열림에 대해 세상이 나에게 화답하는 것이다. 사물의 열림이란 형태로 말이다.

이와 같은 열림의 교환, 즉 나 자신의 열림에 화답하는 세계의 열림은 곧 사물의 신비로의 여행이자 또한 김화영이 말한바 '행복의 충겨'이기도 하다. 세상은 나에 대해 화답하고 자신을 열오놓는다는 것. 그래서 나를 자신 속으로 들여보낸다는 것. 바로 이것이 '행복의 충격'이다. 나의 요구에 대해 세상은 자신을 열고 자신의 신비 속으로 여행을 시켜준다는 것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환'은 또한 흐민의 약속이기도 하다. 세상은 언제나 자신의 요구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