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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사랑

사랑에 관한 단상


사랑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자면 일종의 존재의미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것을 위해 태어난 그것, 우리가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 말이다. 그러한 사랑은 상징적 질서를 벗어나는 일종의 탈언어적 절대일 수 있겠다. 가장 커다란 쾌락으로서 말이다. 즉 사랑은 상징적 질서를 일시에 붕괴시키면서 섬광처럼 출현하는 절대의 체험일 수 있다. 어떤 원천적인 결여를 충족시켜주는.

사랑은 사랑에 빠진 자들을 완전히 사로잡고, 그리하여 기존의 상징적 질서로부터 끄집어낸다. 그래서 그들은 더이상 과거처럼 살지 못한다. 사랑에 빠진 자들은 사랑으로 자신을 포획한 타자 속으로 완전히 빨려들어간다. 그러니 더이상 공동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공동체를 이탈한다. 공동체는 사랑에 대립한다. 사랑에 빠진 자들은 자신들의 탈언어적 '절대'를 유지하기 위해 오직 둘이서만 있기를 희구하기 때문이다.
- 여기에서 듀안 마이클의 사진이 떠오르는건 (천사와 여자의 사랑 - 지상으로 유폐되어버린 천사)

'첫눈에 반하는'현상은 동물학적 현상으로서의 사랑 그 자체일 것이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은 우리 내면에 잠재하고 있던 사랑의 힘이 일종의 대상a에 의해, '미적 미끼'에 의해 호출(interpeiiation)되는 것이다. 종의 재생산을 위해 우리 체내에 프로그램화된 동물학적 현상으로서의 사랑은 무엇보다도 이와 같은 호출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교류와 성교를 기본적 내용으로 한다. 교류와 성교를 비롯한 모든 사랑의 현상은 그러한 호출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므로, 동물학적 현상으로서의 사랑에서 그러한 호출은 사랑의 핵심 자체을 구성한다. 그러한 호출에서 교류, 성교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단절도 없을 뿐더러 교류와 성교가 그러한 호출로부터 직접적으로 도출되기 때문이다.
- 난 누군가로부터 호출당하고 싶다. (김영하의 소설제목은 왜 떠오르는 걸까)

그러나 사랑을 진리의 공정으로 보는 관점에서는 (알랭 바디우) '첫눈에 반하는' 호출의 현상은 '사랑의 불씨'에 불과하다. 이 사랑의 불씨는 사랑으로 이어질 수도 잇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즉 사랑의 불씨는 쉽게 꺼져버릴 수 있는 위험에 처해 있다. 그 위험의 본질은 '대상a' 또는 '미적 미끼'의 담지자를 자신과 동등한 개별적 '주체'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a'의 담지자로서만 취급하는 데 있다. '대상a'의 담지자를 하나의 주체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a'자체로 환원될 수 있는 대상적 존재로 간주하면 사랑의 불씨는 꺼진다는 것이다. 그처럼 대상화된 존재는 사랑의 상대가 아니라 육체적 욕망의 대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존재는 어떤 근원적 결여를 충족시켜주는 '절대'의 체험을 가져다주는 존재가 아니라 단지 육체적 욕망의 방출구에 불과한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동물학적 힘으로부터 사랑의 여러 형태들을 도출시키는 디오티마적 입장이 잘못되었다고 결론지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디오티마적 입장이야말록 죽음보다 강력한 사랑의 엄청남 힘을 다른 어던 입장들보다 설득력 있게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나의 디오티마!

이종영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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