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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소에 두고 온 시

이종영, 『부르주아의 지배』, 새물결, 2008


이종영의 글은 언제 보아도 치열하고 냉철하면서도 매혹적이다. 철학 그것도 정치철학의 글이 이렇게 매혹적일수 있을까 싶다. 보이지 않는 흐름들을 짚어내고 분석하는 그의 과학적 노동의 결과가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그의 글은 너무 아름답다. 이종영 만큼이나 일관된 견지와 흐름을 가지고 고집스럽게 자신의 길을 가는 학자가 있나 싶을 정도로 그의 발걸음은 굳건하다. 이종영을 만나고 그의 글을 읽게 된 것은 나에게 큰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학을 제외하고 이렇게 오랫동안 곱씹을 만한 글들을 던져주는 학자가 그리 많지 않은 우리 학계의 현실을 보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미 고인이 된 많은 학자들이 좋은 글들을 남겼고 그 글들 역시 현재진행형이긴 하지만 앞으로를 기대할 수 없기에 가지는 안타까움을 씻어주는 책들이기에 그렇다. 고종석도 그러하긴 하지만 어쩐지 그의 글은 가지와 지평이 너무 넓어 호불호가 나뉜다.

이종영의 글을 처음 읽게 된 것은 '우연속의 필연'이라고 해야 할까. 단지 현학적이고 자위적 책읽기에 빠져 있던 나에게 지인이 함께 하자고 한 <생태문화연구회>에서 그의 글을 처음 읽고, 경이로움에 빠져 있었다. 연구회 덕에 이종영 선생님을 모시고 그의 강의를 들으며 세미나를 진행할때는 연구하는 학자 특유의 말솜씨 덕분에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그 강의속에 조금씩 빠져드는 모습이 조금은 의아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그게 벌써 8년여전의 이야기인가 보다.

새물결 이행총서에서 나온 그의 책은 나의 책꽃이에 나란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지배와 그 양식들』,『성적 지배와 그 양식들』,『내면성의 형식들』,『사랑에서 악으로』,『정치와 반정치』그리고 이번 『부르주아의 지배』까지. 이번 책을 읽기 시작한 건 작년 즈음이었는데 게으름과 무지탓에 묵혀놓고 있다가 이번 기회에 다시 책을 읽게 되었다. 몇 년 전 여름즈음엔 도서관을 출입하며 그의 책 다섯권을 다시 읽으며 정리를 시작했으나 역시 나의 게으름 덕에 책의 간지와 밑줄로만 흔적이 남아있다. 다행히 블로그에 노트를 몇 개 해놓았으나 만족스럽지 않다. 조금은 어려운 책인데다 나의 전공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지만 그 근본과 뿌리는 모두 같다고 생각하며 긴 호흡을 가지고 읽게 되나 보다. 언젠가 그의 강의를 청강으로라도 듣게 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매혹적인 글을 만난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그 책속에 빠져 시간을 잊고, 나를 잊고, 상처를 잊는다. 책속에서 또 다른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그 상처 역시 나를 치유하는 또 다른 생명수라는 생각을 한다. 그의 책이 있기에 지난 몇 년간을 견디었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어떤 시기에 맞는 책들이 개인들마다 있다. 그 시절 즈음해서 나에겐 이종영이 있었고 롤랑 바르트가 있었다.